문래동은 1895년 칙령 제 98호 의해 전국을 23부 337군으로 나눌 때 인천부 12군 중 시흥군에 속했습니다. 다음 해, 1896년에는 칙령 제 36호로 전국을 13도 339군을 개정하고 각 군을 5등급으로 구분하였는데 이때에는 경기도 38군 중 시흥군 상북면에 소속되었습니다.
그 후 1936년 조선총독부령에 따라 경성부 관할구역을 확장하면서 행정구역상 도림동에 소속되어 한성부로 편입되었고, 1942년에는 도시계획에 의해 경인 철도 북쪽은 현재 영등포동에 편입되었습니다.
광복 후 1949년에는 대통령령에 의해 서울특별시 행정구역 확장이 되면서 도림동 일부와 영등포동 일부를 사옥동이라 하였으며, 1952년 문래동으로 개명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조선 시대의 문래동은 늪지대 또는 벌판이 대부분으로 민가는 거의 없었습니다. 1900년대부터 개척되어 늪지대를 메꾸었으며, 일본 강점기에는 영등포 초등학교, 방직회사들이 들어서면서 점차 마을이 형성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시민은 근방을 개간해 농토로 이용하였고, 1960년 이후부터 도로변에는 철재 관련 업종의 상가가 형성되거나 그 외의 지역은 군소 공장과 주택들이 자리 잡기 시작하였습니다. 일본 강점기 말기 대륙침략정책으로 군수공업이 호황을 이루며 기계, 제련, 염색 등 중화학 계열의 군소 공장이 건립되어 점차 철제 상가 및 자동차 정비단지가 세워지고, 대선제분, 방림방적, 롯데삼강, 남영 나일론, 신한전기 등이 위치하였습니다.
문래 1가에서 문래 3가는 철재 상가와 자동차정비단지, 방림방적, 대선 제분 등 공장이 들어선 준공업 지역이었으나, 점차 아파트 단지가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경성방직, 방림방적 등 섬유공장이 해외로 이전되고 신시가지 조성사업에 따라 대형 할인 매장(홈플러스)과 아파트 단지(문래자이, SK리더스뷰 등)가 들어서게 되었고, 아파트 단지 주변으로 문래로데오 거리, 문래공원 등 주민편의시설이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한때 철강 1번지로 명성을 얻었으나 점차 쇠락의 길을 걷던 문래 철재 상가 자리에 저렴한 임차료를 구하는 젊은 예술가들이 모이면서 문래창작촌이 형성되었습니다. 예술인의 창작활동과 예술 시장의 저변 확대를 지원하기 위한 예술 거리 조성, 문래예술공장 개관 등 변화의 물결이 일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술가들과 함께 특색있는 식당, 상점들이 들어서면서 상업화가 진행되었고, 반면 지역의 터줏대감이었던 철공인들은 상대적으로 입지가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이에 2018년, 문래동은 영등포 경인로 일대 도시재생사업 및 문래기계금속집적지로 지정되면서 철공인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지원사업이 추진되고 있습니다. 문래동 지역 재생을 위해 철공인, 청년, 예술가 간의 네트워킹을 통한 상생을 위한 협력체계 구축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