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내용 바로가기

지역 소개

  • 페이스북에 공유

오래 전 문래동은 어땠을까?

문래동은 1895년 칙령 제 98호 의해 전국을 23부 337군으로 나눌 때 인천부 12군 중 시흥군에 속했습니다. 다음 해, 1896년에는 칙령 제 36호로 전국을 13도 339군을 개정하고 각 군을 5등급으로 구분하였는데 이때에는 경기도 38군 중 시흥군 상북면에 소속되었습니다.

그 후 1936년 조선총독부령에 따라 경성부 관할구역을 확장하면서 행정구역상 도림동에 소속되어 한성부로 편입되었고, 1942년에는 도시계획에 의해 경인 철도 북쪽은 현재 영등포동에 편입되었습니다.

광복 후 1949년에는 대통령령에 의해 서울특별시 행정구역 확장이 되면서 도림동 일부와 영등포동 일부를 사옥동이라 하였으며, 1952년 문래동으로 개명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문래동(文來洞/Mullae-dong)
문래동은 1930년대 군소 방직공장이 들어서자 일본인들에 의하여 사옥동(絲屋洞 )이라 불리면서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광복 후 우리 식으로 이름을 고칠 때 ‘물레(紡車)’라는 방적기계의 발음을 살려 문래동으로 이름 지어졌다는 설이 있고 또 일설은 학교와 관공서 등이 들어서자 글이 온다는 뜻에서 동명이 붙여졌다는 설이 있으나 전자의 설이 일반적이다.

조선 시대부터 철강 1번지로 서기까지…

조선 시대의 문래동은 늪지대 또는 벌판이 대부분으로 민가는 거의 없었습니다. 1900년대부터 개척되어 늪지대를 메꾸었으며, 일본 강점기에는 영등포 초등학교, 방직회사들이 들어서면서 점차 마을이 형성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시민은 근방을 개간해 농토로 이용하였고, 1960년 이후부터 도로변에는 철재 관련 업종의 상가가 형성되거나 그 외의 지역은 군소 공장과 주택들이 자리 잡기 시작하였습니다. 일본 강점기 말기 대륙침략정책으로 군수공업이 호황을 이루며 기계, 제련, 염색 등 중화학 계열의 군소 공장이 건립되어 점차 철제 상가 및 자동차 정비단지가 세워지고, 대선제분, 방림방적, 롯데삼강, 남영 나일론, 신한전기 등이 위치하였습니다.

  • 1920년대 영등포역 시가지주변 모습 ⓒ영등포구청 1920년대 영등포역 시가지 모습 ⓒ영등포구청
  • 1930년대 문래동에서 바라본 경인로 ⓒ영등포구청 1930년대 문래동에서 바라본 경인로 ⓒ영등포구청
  • 1930년대 경성방직 공장 ⓒ영등포구청 1930년대 경성방직 공장 ⓒ영등포구청
  • 1930년대 경성방직 공장 ⓒ영등포구청 1930년대 경성방직 공장 ⓒ영등포구청

공장단지의 철수와 아파트 단지 활성화

문래 1가에서 문래 3가는 철재 상가와 자동차정비단지, 방림방적, 대선 제분 등 공장이 들어선 준공업 지역이었으나, 점차 아파트 단지가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경성방직, 방림방적 등 섬유공장이 해외로 이전되고 신시가지 조성사업에 따라 대형 할인 매장(홈플러스)과 아파트 단지(문래자이, SK리더스뷰 등)가 들어서게 되었고, 아파트 단지 주변으로 문래로데오 거리, 문래공원 등 주민편의시설이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 방림방적 자리에 들어선 홈플러스 방림방적 자리에 들어선 홈플러스
  • 조선 맥주 자리에 들어선 푸르지오 아파트 조선 맥주 자리에 들어선 푸르지오 아파트
  • OB 맥주의 흔적이 남아있는 영등포 공원 내 조형물 OB 맥주의 흔적이 남아있는 영등포 공원 내 조형물
문래 4가에서 6가는 안양천을 끼고 있는 지역으로 1960년 이후 섬유 및 음료 등 식품 공장이 들어선 공장지대였으나, 수도권 이전 정책에 따라 대형공장이 이전하면서 현대, 한신, 진주 아파트 등이 1985년부터 건립되기 시작했습니다.

문래창작촌의 형성과 소비 위주의 상업화

한때 철강 1번지로 명성을 얻었으나 점차 쇠락의 길을 걷던 문래 철재 상가 자리에 저렴한 임차료를 구하는 젊은 예술가들이 모이면서 문래창작촌이 형성되었습니다. 예술인의 창작활동과 예술 시장의 저변 확대를 지원하기 위한 예술 거리 조성, 문래예술공장 개관 등 변화의 물결이 일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술가들과 함께 특색있는 식당, 상점들이 들어서면서 상업화가 진행되었고, 반면 지역의 터줏대감이었던 철공인들은 상대적으로 입지가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이에 2018년, 문래동은 영등포 경인로 일대 도시재생사업 및 문래기계금속집적지로 지정되면서 철공인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지원사업이 추진되고 있습니다. 문래동 지역 재생을 위해 철공인, 청년, 예술가 간의 네트워킹을 통한 상생을 위한 협력체계 구축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습니다.

  • 문래창작촌 입지한  작가의 작업실
  • 문래 예술거리에 입지한 카페
  •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문래 상점

사진으로 보는 영등포 경인로 일대 성장과 쇠퇴

1930 경인선 개통과 더불어 공업지대 조성
  • 1930년대 경성방직공장
  • 1970년대 경성방직공장
  • 경인선개통
  • 영단주택
제조업 공장 밀접 + 배후 주거지 영단 주택 밀집
1899년 경인선과 1904년 경부선이 개통하며 분기점인 영등포역으로 중심으로 영등포구에 근대화의 바람이 불고 교통·통신 및 물류의 중심지로 성장하게 됨.
1937년 영등포 구획정리사업에 따라 공장용지가 확보, 군수사업체들과 경성방직, 종연방적, 동양방적 등 방적공장 및 기타 염색·제분·요업·자기 등 공장들이 대량입지.
1970 대규모 제조산업 전성기
  • 1950년대 영등포역 근처
  • 1980년대 방림방적 공장
  • 조선맥주
  • 오비맥주
대한민국 경제성장의 원공간 경인로변, 문래동 일대 기계금속 공업지역 형성
1970년대 영등포지역은 구로공단개발 및 신도림동, 고척동 등 공업단지화와 더불어 공업지역으로서의 전성기 이룩함.
1990~2000 산업이탈, 대규모 공장 지방이전, 산업ㆍ환경 쇠퇴 지속
  • 1990~2000년대 사진1
  • 1990~2000년대 사진2
  • 1990~2000년대 사진3
  • 1990~2000년대 사진4
영세 소공인 공장 밀집, 공장 이전적지는 소비적 공간으로 변화
1980년대 수도권 인구집중억제정책의 추진 등에 따라 공장의 신설이 억제되고 대형공장이 수도권 외곽으로 이전하면 이적지에 주거지화가 진행, 제조업 중심의 공업지역으로서의 명성이 쇠락하기 시작함.
1990년대에는 대규모 공장부지 이전으로 영세 소공인 공장이 밀집되고, 공장 이적지는 주거·상업의 소비적 공간으로 변화하였음.